제4의 정치이론: 짧은 프레젠테이션

제4의 정치이론: 짧은 프레젠테이션

이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제4의 정치 이론(Forth Political Theory, 이하 4PT)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음 일련의 그림들에 주의 깊게 집중하는 것이다.

1. 제4의 정치이론. 이 심볼은 숫자 4와 목성의 상징인 질서, 군주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인도-유럽의 천국의 신 -디아우스, 제우스, 데우스- 의 상징이다.

2. 모든 정치 이론은 역사의 패러다임에 의해 정의된다 - 그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4PT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기본 패러다임을 고려해야 한다.

프리 모더니티(전통사회)

모더니티(현대 사회)

포스트 모더니티(모든 사회적 유대관계와 모든 형태의 집단적 정체성 -젠더를 포함함- 이 파괴되어 이러한 것들을 전부 "선택적"으로 만드는 포스트-사회 혹은 해체-사회)

3. 세가지 주요 정치이론(자유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aka "파시즘")은 두 번째 패러다임, 즉 모더니티에 속한다. 셋 모두 본질적으로 현대적이며, 데카르트적인 주제 개념을 중심으로 계몽주의 철학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지형을 다루고 있다.

4. 세가지 정치이론은 방향의 특수성을 가진 공간에 위치할 수 있다. 그래서 1PT(자유주의)는 열린(필수!) 원의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를 두고있다. 2PT(공산주의/사회주의)는 왼쪽에, 3PT(민족주의, 파시즘)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자유주의가 가운데에 위치하는 것은 철학적 의미에서의 중심을 말한다. 이것은 왼쪽과 오른쪽이 어디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왼쪽과 오른쪽은 1PT와 연관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더니티가 의심의 여지 없고 도전받지 않은 채 승리를 거머쥐는 이유가 된다.

5. 세가지 정치이론은 그것을 식별하는 세가지 유형의 데카르트적인 주제를 제안한다.

개인에 대하여 (1PT - 자유주의)

계급에 대하여(2PT - 공산주의/사회주의)

민족/인종에 대하여 (3PT - 민족주의, 파시즘, 나치즘)

6. 세가지 정치이론 간의 관계와 동맹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1PT+2PT vs 3PT(제2차 세계대전) 혹은 2PT+3PT vs 1PT(독일-소련 불가침 조약)과 같은 옵션이 있다. 20세기는 주로 이데올로지적인 갈등으로 세가지 정치이론 간의 경쟁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역사는 두 종류의 동맹 모두 20세기에 실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7. 제2차 세계대전에서 1PT+2PT 가 3PT에 대해 공동의 승리를 거둔 이후, 3PT는 정치적 현실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1945년 이후, 3PT는 과거에 남겨지거나, 세계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의미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 순간부터 1PT와 2PT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그것이 20세기 후반의 시기가 가지는 의미였다.

8. 20세기의 끝은 곧 1PT와 2PT의 싸움의 끝으로 판명되었다. 1PT는 완벽하게 승리했고, 이때부터 1PT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치이론으로 남았다. 자유주의는 승리했고 세계 규모의 보편적인 사상 체계(Pensée Unique)가 되었다. 따라서 세계화 등이 진행되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1991년부터 우리는 자유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더 이상 3PT도 2PT도 존재 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그것들을 되새기는 것 또한 자유주의적인 시뮬라크르였다.

9.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은 자유주의의 명확하고 절대적인 (좌, 우, 극좌, 극우 모든 종류에서의) 지배 아래 본질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미국과 NATO를 글로벌 중심으로 한)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단극적이다. (정치적 글로벌 엘리트들과 그들이 납득시키고 마인드 컨트롤하는 대중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2PT와 3PT를 가지고 1PT에 대하여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PT와 3PT 모두 자유주의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다. 자유주의(1PT)의 절대적 지배는 어떠한 진지한 대안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것은 없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극적인 공간 안에서 머무르거나 혹은 인공적 시뮬라크르 로 이뤄진 미로 -극좌파 아나코코뮤니스트 자유주의와 극우파 거대자본 자유주의 사이- 의 곡선을 따라 회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10. 여기서 4PT의 지평이 떠오른다. 우리가 여전히 대안을 고집하고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따라서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기 때문에), 모더니티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이해한다면 (유사 좌파 진영과 유사 우파 진영 모두에 동참하기를 거부), 2PT와 3PT을 넘어서는 대안을 필요로하게 된다. 이로부터 논리적으로 제4의 정치이론(4PT)의 필요성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1PT(자유주의)의 글로벌한 승리로 모더니티가 끝맺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F.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사실상 모더니티의 종언이었고, 그에 따른 포스트-모더니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티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인데, 왜냐하면 자유주의 안에서(그 밖이 아닌)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규정하는 것은 자유주의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지금 주어진 대로) 모더니티의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 단계, 자유주의의 절정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티는 1PT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승리를 배경으로 한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티가 글로벌해야 하는 이유다(인간 이하 수준인 미시-규모의 파편으로 쪼개진 사람들을 통합하는 동시에, 글로벌 및 초국가적 거시-구모로 진보적 통합을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지역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러나 모더니티를 넘어서 (자유주의/포스트-자유주의) 사회, 정치, 지정학적 질서의 그 원칙들이 모두 뒤흔들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티로 향하는 전환의 순간, 이제는 대안을 제시할 때이다. 자유주의(1PT)의 대안뿐만 아니라, 모더니티 전체 -1PT는 정치적 모더니티의 본질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한다. 1PT는 지난 세기 동안 모더니티의 바로 그 본질을 구현할 권리를 위해 3PT와 2PT를 상대로 투쟁했고, 승리했다. 그러므로 대안(4PT)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모더니티에 세뇌당하거나, 포스트-모던의 삐뚤어진 발전에 매료되어서는 안 된다. 프리-모더니티의 재발견만이 유일한 논리적 단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주의 철학과, 그리고 개념으로서 현대 세계에 대한 필수적인 비평들을 만나고 있다.

4PT를 건설하면서 우리는 프리-모더니티의 재발견에 도달할 것이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철학적 우주(영원성, 신, 천사, 영혼, 악마, 세상의 종말, 죽은자의 부활이 존재하는 곳)에 속하는 원칙과 가치의 현대적 구조 안에서 이해될 것이다.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된 과거의 개념은 (더 이상 없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영원성의 차원과 (앞으로 도래할)시대의 절대화에 대한 부정을 기반으로하는 모더니티의 개념이다. 프리모더리티는 과거가 아니다. 프리모더니티는 영원성의 근본적 신념에 기초하여 구축된 사회, 문화, 민족의 세계관 그리고 정치체계이다. 모더니티는 그것을 부정한다 - 따라서 그것의 연대기 중심의 인식론일 수 밖에 없다.

모더니티의 맥락을 따라, 우리는 데카르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의 실제 규범적 해석은 자유주의적인 것 - 즉 개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프리-모더니티적인 이해와 그 본질을 어필하기 위해 이러 개인에 대한 개념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11.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디서 기반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 -정확히는 제3의 전체주의(이번에는 자유주의적인 것)라는 의미에서- 는 이미 휴머니티를 파괴해왔고, 그것을 개인의 집합(인권이라는 교리)으로 대체해버렸다.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자유주의의 규범적 주제들(개인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포스트-휴먼)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공허에 남겨졌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비-개인주의적 존재론과 인류학을 제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프리-모더니티적 유형의 주제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구닥다리 내지는 끔찍한 것으로 -극단적으로는 범죄적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이것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찌꺼기로 여기고, 계몽주의의 첫단계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할 것이다 -자코뱅과 볼셰비키가 기독교 사제들과 왕자들을 죽인 것처럼 그냥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특수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일 수 있다. 순교의 길은 위대한 길이다.

하지만 다른 해결책이 있다. 전체주의적인 자유주의의 개념에서 증명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재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에 호소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개념이 강제적으로 가짜가 되어있고, 자유주의적인 전체주의 문화가 인간의 형상을 질서와 화합, 모든 종류의 집단적 정체성(또는 그 이상- 모든 정체성)으로부터 점점 더 분열시킬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재는 여기에 있다. 정말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이곳에 있다! 그래서 4PT는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시대, 현존재를 기반으로서 받아들인다. 전통과 영원으로의 회귀는 개인에 의해서도, 계급에 의해서도, 민족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현존재는 인간의 존재론적 뿌리, 존재의 핵이다. 현존재는 잘못된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논증이고 4PT의 주요 특징이다. 제4의 정치이론은 실존적이다. 그리고 현존재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전통을 향해 도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반이 결여될 것이다. 전통주의는 실존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가 될 것이다.

12. 따라서 우리는 4PT의 최종 구조에 도달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러길 소원하다).

13. 이 모든 철학적 고려사항(제4의 정치이론의 구조를 명시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적 단계)은 정치적 관례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4PT의 주요 아이디어를 다른 많은 사람들의 현실에 투영하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만,보다 더 분명한 응용이다. 마지막 계획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를 관찰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지형은 날이 갈수록 투명해지고 명백해진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