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을 이해하려면 이 사람을 보라 … 알렉산드르 두긴
알렉산드르 두긴(60)은 러시아의 정치철학자이다. 그는 지식인 가운데 유일하게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 이후 제재 명단에 올라 미국과 캐나다 입국이 금지됐다. 두긴은 러시아를 20년 동안 지배해 온 ‘푸티니즘’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틴의 브레인’으로 불린 두긴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일각에선 그를 제정 러시아 말기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폭정을 일삼은 그레고리 라스푸틴에 비유하기도 한다.
두긴은 196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신비주의 철학과 정치적 급진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소련 체제에 비판적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가 아니라 전통을 말살했다는 것이 핵심적 이유이다. 그는 2017년 프레시안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1917년 소련의 탄생으로 이어진 볼셰비키 혁명을 “러시아 문명을 소멸시킨 좌파 버전의 역사의 종언”, “도둑맞은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볼셰비키 혁명은 18세기 이후 추진된 서구적 근대화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 적극 참여해 성공했지만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방식의 서구화로 귀결됐다고 설명했다. 두긴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막론하고 서구의 근대문명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두긴에 따르면 서구 근대문명이 휩쓸기 전 세계는 유교, 이슬람, 힌두교 등 다양한 문명이 권역을 나눠 공존했다. 서구 문명은 유라시아 각 지역의 전통에 기반한 영적인 삶을 파괴하고 물질주의와 폭력적 진보주의를 전파했다. 소련마저 무너진 이후 ‘대서양주의’가 유일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 워싱턴 정치 엘리트, 뉴욕 월가 경제 엘리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력이 대서양주의의 하드웨어라면 자유민주주의, 다인종·다민족 공존, 페미니즘, 성소수자 등 정체성 정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대서양주의의 지배 결과에 불과하다.
두긴은 20세기초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유라시아주의’를 다시 주도하고 있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가 대서양주의를 밀어내고 유라시아의 지배권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페인 폼페우 파브라대학의 산티아고 자발라 교수와 이탈리아 언론인 클라우디아 갈로는 알자지라에 실린 공동기고문에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유사한 관점”이라며 “헌팅턴이 이슬람 문명이 서구 문명의 주된 도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면 두긴은 러시아가 서구 문명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그렸다”고 분석했다.
두긴은 1997년 출간한 <지정학의 기초 :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에서 러시아가 냉전 종식 이후 국제무대에서 잃어버린 패권을 되찾을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조지아 침공, 우크라이나 병합,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미국의 인종·종교적 분열을 부추기고 고립주의 성향을 촉진하는 것 등이다. 책은 러시아군 장교 교육 과정의 교과서로도 채택됐다. 두긴의 주장은 소련 붕괴 이후 사상적 공백과 정치 권력의 무능·부패에 진절머리를 내던 러시아 엘리트들을 사로잡았다. 두긴은 2009년 발표한 <제4의 정치 원리>에서 개인, 계급, 국가, 인종의 발전 대신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역사와 전통에 통합되는 일’을 정치 원리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긴이 제시한 전략은 푸틴 정권에서 현실이 됐다. 두긴은 지난달 31일 이탈리아 일간지 일템포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와의 대결은 (미국의 단일 패권질서를 몰아내고) 세계질서의 다극화를 가져올 군사적 갈등”이라며 전쟁을 옹호했다. 두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의 사명을 위한 전쟁이다. 맥도날드 등 다국적 기업의 철수도 두긴의 관점에서는 러시아가 대서양주의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다워지는 좋은 일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두긴의 서구 문명 비판은 20세기 초 독일과 이탈리아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추종했던 율리우스 에볼라의 영향이 컸다는 평가다. 러시아가 유럽과 구분되는 별도의 문명권이라는 생각이 새로운 것은 아니며 러시아 안팎에서 꾸준히 존재했다. 하지만 두긴의 영향력은 러시아 국경을 넘어 확산돼 왔다. 두긴의 블로그는 현재 13개국 언어로 제공된다. 벤자민 테이텔바움 콜로라도 볼더 대학 교수는 “두긴은 서구 각지의 반동주의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자코뱅에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22일 두긴의 제국주의 세계관을 재조명하면서 “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망상도 (푸틴 같은) 폭군들이 수용하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